고등학교 다닐 때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음악 선생님이 이태리 명가수인
카루소를 닮았다고 성악을 전공해 보라고 권면했다고 한다.
전공은 신학을 하셔서 목사로 활동하셨지만 인천 장로 성가단, 목사 성가단,
원로 목사 성가단 등 성가단 활동을 여러 곳에서 여러해 동안 하셨다.
성가단에서 솔로로 특송도 하시고 특히 '거룩한 성'은 아버지의 애창곡 이었다.
자식들을 키울 때는 적은 월급에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시려고
절약하며 사셨는데...
암으로 판정받아 누워지내시는 그날 까지 차비를 아끼려고
교통 수단은 자전거를 이용하시며 다니셨던 것이다.
인천에 사셨을 때는 주안에서 창영동까지 낮에는 물론 새벽에 자전거로
새벽기도도 많이 나가셨다고 한다.
내가 전화도 버스도 없는 시골로 시집 가서 목회 생활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나를 도시로 데려 오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와 의논하여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남편을 처가 살이 시키며 중학교 교목 자리를 어렵게 마련 하여 함께 생활 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의 크신 사랑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한번 실감케 한다
그렇게 하여 인천으로 와서 생활 하게 되었고
그 후 큰 교회 부목으로 갈 수 있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 수원에서 큰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말기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병원에 누워계신 시간이 불과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때 자녀들이 돌아가며 병간호를 했는데
한번은 아버지가 휠체어에 앉아서 내 손을 만지시더니 "사랑한다"고 뽀뽀를 많이 해주셨다.
자신이 이제 돌아 가실 것을 예상했던 것 같다.
저는 "아버지 저도 사랑해요"라는 말도 제대로 못한 채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 때가 마지막 사랑 고백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아버지께서 그동안 살아오시며 나에게 주셨던 사랑에 대한 감사를 마음껏 표현하며 아버지에게 사랑한다 말씀과 함께 따뜻하게 안아 드렸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어린아이같이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가슴속의 그 말씀을 깊이 알아듣지 못해서 못내 아쉬움속에 살아가고 있다 .
그러나 이제는 옆에 계시지는 않지만 글로써라도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버지 사랑해요"
천국에서 딸의 사랑의 글을 읽고 받아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주님의 뜻을 많이 행하고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경기연회 사모합창단 단장 김신애사모